웨슬리 신학과 유산 [ 도서출판 진흥. 로벳윔즈(Lovett H. Weems,JR.)]
이 책을 살펴보며 존 웨슬리는 한평생을 설교와 찬송으로 쓴 목회자임을 알게 되며 한편으로는 웨슬리의 원 저작들이 쉽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지지 않아 그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웨슬리는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 성서신학자이자 교리를 설교로 가르친 실천 신학자이다. 무엇보다 웨슬리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웨슬리 조직신학으로 교리를 전해주지 않고 설교로 교리를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웨슬리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삶과 신학을 이해할 수 없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행하시는 은혜, 의롭게하시는 은혜, 성화케 하시는 은혜 등 서로 다르게 표현한다. 이는 성경에서 성령을 보혜사 성령,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 등으로 다양하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순간순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 뿐 하나님 은혜의 본질이 다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 없이는 믿음도, 구원도, 영적 성장도 없음을 웨슬리는 강조하고 있다.
서 론
[웨슬리 부흥운동의 중심에 있는 신학]
후기 연구들은 점점 웨슬리와 웨슬리 부흥운동에서 나오는 풍부한 신학들을 발견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웨슬리의 전통은 교리의 문제를 심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콜린 윌리암스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감리교의 초기 전통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의 감리교는 영혼의 부흥뿐만 아니라 신학의 부흥도 이루었기 때문이다. 신학과 삶은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웨슬리의 사중 표준과 그 상호 의존관계: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길을 믿으며 경험의 진위를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성경을 사용하며 신앙과 실천의 문제들에서 성경을 최종적 권위로써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중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회 뿐만 아니라 고대의 교회도 존경한다. 신앙의 선조들의 글들을 사용하며 특별히 초대 교부들의 글들은 가치가 있다고 보며 영국 교회의 표준들은 유용하다.
웨슬리가교리에 다가가는지는 사중 표준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그가 사용한 방식을 생각해 봄으로써 더욱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 전통, 경험, 그리고 이성은 기독교 신학을 위한 중요한 가이드라인과 원자료의 구성요소를 이룬다.
의견과 교리 – 감리교인들과 감리교 신학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태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몇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생각하라 그리고 생각하게 하라”(think and let think)라는 웨슬리의 교훈이다. 웨슬리는 자주 이런말을 언급하였다. “감리교인의 남다른 특징은 어떤 종류의 의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인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웨슬리가 말하는
의견들과 핵심 교리들 사이의 중대한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진리는 “생각하고 생각하게 하라.”라는 웨슬리의 교훈은 무엇보다도 생각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이란 “안개속에서 보이는 모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흐리멍텅한 이해”를 지닌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웨슬리의“생각하라. 그리고 생각하게 하라.” 라는 주장은 “의견은 기독교의 뿌리를 흔들지 못한다.” 라는 의미로 참고 되었을뿐 웨슬리는 “본질적 진리”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했다.
본 론
[하나님의 형상과 원죄]
웨슬리는 인간의 죄에 대한 교리에 있어 그 우선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특별히 에덴동산과 아담의 “타락”을 설명하는 창세기에 의존하고 있다. 두 번째 근거는 경험이다. 웨슬리가 말하는 경험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확증하는 데에 있다. 웨슬리는 인간의 죄악성에 대해 증거하는 수많은 성경적 근거를 보았다. 웨슬리는 창세기의 타락 이전의 완전한 존재의 상태를 발견했다. 이는 인간이 창조된 모습 곧 하나님 형상을 완전히 표현한 상태이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얻은 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완전한 상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만물의 주인이신 분이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롭게, 하늘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인간은 지음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인간은 사랑 안에 거하면서 인간은 하나님 안에 살았고, 하나 님은 인간 안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한 자신의 형상으로, 영광의 썩지 않을 자신의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어떠한 면도 없이 순결하시기에 인간도 순결하였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정도의 악도 몰랐고, 오히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죄가 없고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영혼을 다해, 힘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 타락]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성의 원상태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다.웨슬리에게 있어서 죄란 모든 인류에게 스며들었고,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웨슬리가 옥스퍼드(Oxford)에서 설교했던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전부 부패하였고 혐오스러울 정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적 타락이다. 성경이 증거하고 웨슬리 자신의 체험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웨슬리는 자신의 관점을 증명하는 역사의 실례들을 계속 모았고 이러한 예들을 정리하면 “앞선 본문들에서 우리의 본질은 깊이 부패하였으며, 악으로 기울어져 있고, 모든 영적인 선함을 거부하려 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물론 더 많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만 신적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것도 할수 없거니와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웨슬리는 죄의 양면성을 말하엿는데, 그것은 원죄(original sin)와 자범죄(actual sins)이다. 원죄는 죄의 상태로 모든 사람에게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웨슬리에 의하면 자범죄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죄를 언급하면서, ”모든 사람은 죄인임“을 말한다. 또한 자범죄의 정복을 언급하면서는 ”완전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선행 은혜와 회개(PREVENIET GRACE AND REPENTANCE)]
그리스도인의 영적 순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웨슬리는 인간적이고 영적인 복잡한 문제들을 사람들이 쉽게 다루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고뇌와 영적인 싸움으로 방어하였다.
[하나님이 먼저 일하심(God's Initiative)]
웨슬리의 인간 이해는 원죄로부터 시작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죄가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경험 없이 사는 것에 대해 만족하지 않으신다. 원죄로부터 벗어나 나오길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우리는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은혜로 다가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시작을 선행하시는 은혜, 혹은 선재적 은총이라고 부른다. 선행 혹은 선재라는 말은 "앞서 오시는"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은혜의 처음 모습이다. 선행 은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함을 예고하고 준비시킨다. 선행 은혜는 어느 정도의 "생명을 향한 마음, 구원의 가능성, 눈멀고 무감각한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선행 은혜라는 용어를 양심 혹은 "자연적 양심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선행 은혜는 계속해서 임하지만, "성령을 억누름으로 인해 이 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먼저 일하심과 인간의 응답 이 두가지 중요한 에너지를 연합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주하는 칼빈 신학파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가톨릭 신학이 벌이는 논쟁의 중심에서, 웨슬리는 선행 은혜라는 성경적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만니는 두 영역의 조화를 이루어 내었다. 회개란 양심의 가책이라기보다 오히려 참된 자기이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는 말한다 . “회개하십시오. 회개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죄인이라는 것을 똑바로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JUSTIFICATION BY FAITH)]
믿음의 올바른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큰 일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세울 어떠한 공로도 없는 것이다. “당신의 믿음도 당신의 구원도 아닙니다.
구원은 받을 만한 자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일 따름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 복음의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요, 모든 사람을 위해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값없이 주는 은혜의 특징들중 첫째, 은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에 근거한선물이다. 둘째, 은혜는 모든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속죄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초대이다. 셋째, 은혜는 모든 사람안에 값없이 임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앞서 행하시는 선하심이 모든사람을 이끌고 힘주신다. 넷째, 구원도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다섯째, 완전 성화내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인, 구원의 완성도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THE WITNESS OF THE SPIRIT)]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롬8:16)라는 바울의 말은 확증의 교리로 알려진, 웨슬리가 말하는 성령의 증거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 된다.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는 신자들의 영혼에 임하는 내적 인상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이것은 죄를 용서 받았다는 “내적자각”이며, 삶의 기쁨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이고, “구원의 확신”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CHURCH AND THE CHRISTIAN LIFE)]
교회의 본질은 첫째,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실로 가시적인 교회든 비가시적인 교회든 전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설교입니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믿음이 약해지고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셋째, 성례전의 의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일반적인 은혜의 수단입니다. 은혜의 수단으로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은혜의 수단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영적인 감각을 항상유지하라는 것과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기 전에 당신의 영혼 안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하며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해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떠한 은헤의 수단을 사용한 후에라도, 당신 자신을 평가하면서 무언가 큰일을 해내었다고 자축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이러한 일은 모든 것을 해악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이다.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의 성장(GROWTH THROUGH CHRISTIAN COMMUNITY)]
“사도와 같은 설교라도 죄를 깨닫게 하는 일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훈련되어지는 일이 함께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단지 살인자의 자녀를 양산하는 일이 될뿐이다. 말씀을 듣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 못지않게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격려하고, 성찰하고, 봉사하는일도 필요하다고 믿었다. 모든 성도들은 반드시 다른 성도들을 위해 영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웨슬리의 생각이다.
[마음과 생활의 성결(HOLINESS OF HEART AND LIFE)]
그리스도의 완전에 관한 교리의 근원들은 성결, 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웨슬리의 말씀 선포는 그 기초를 성경, 전통, 이성, 그리고 체험에 두고 있다.
성령님,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을 깨끗케 하여 주시어, 당신을 완전히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전심으로 찬미하게 하소서.“라는 웨슬리가 이해하는 완전이란 것이다. 웨슬리는 1928년 9월22일 목사 안수식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포터(John potter)감독은 목사에게 주는 역사적 임무라는 글을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을 향해 헌신해야만 하는 당신의 본분에 따라,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당신의 수고와 돌봄, 노력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이성을 통해 성장이 존재를 만들어가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 태어난다.
웨슬리는 자신의 영적 여정을 통한 경험으로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수용되어야 함을 확신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지, 실수,유혹,육체적 또는 정신적 연약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식 판단, 행동에서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절대적 완전이란 있을수 없다. 용서받을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된 그런 완전은 결코 없다.
웨슬리는 완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피하기 위해 이성의 중요성을 더욱 의지하였다. 이러한 완전 이해는 죄와 은혜에 대한 기독교 복음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의 이 웨슬리 부흥운동에서 선포된 복음보다도 너무나 자주 율법주의적인 규칙서들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완전한 사랑(Perfect Love)]
웨슬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안에서의 완전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왜 당신은 행복하지 않습니까?
웨슬리는 행복하지 않은 주된 이유를 당신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
존 웨슬리는 선포하기를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만드는 것은 실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 복음 아닌 복음을 알지 못하고,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알지 못합니다.” 웨슬리에 의해 시작된 복음 전도의 불꽃은 지난 100년이 넘는 동안 우리의 삶에 직접적이고 계속적인 관계를 가져다 준 개혁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결론에 케네스 보울딩(Kenneth E. Boulding)도 다음과 같은 말로 동의한다. “웨슬리는 노예를 해방시킨 정치가도 아니요, 노동법을 통과시킨 경제가도 아니다. 그는 무지하고 무분별한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킨 복음 전도자였다.”
복음전도 와 개혁 : 웨슬리에게 있어 첫째 되는 사명은 언제나 복음 전도에 있었지, 개혁이 아니었다. 웨슬리의 방법은 복음 전도였다. 그는 먼저 개인의 변화와 사회적 악습을 고쳐 나가는 일에 호소하였다. 웨슬리 자신의 강력한 신앙 체험은 그를 사회적으로 민감하게 만들었고, 이는 그의 사회개혁 전략의 근저를 이루게 하였다.
웨슬리가 강조한 것은 남자건 여자건 그들의 마음에 성결을 뿌리내리고자 하는 적극적인 목표였다. 결국 웨슬리가 개혁하고자 한 이러한 노력은 도덕과 생확방식의 개혁 운동으로 나타났다 할지라도 언제나 참 “이웃사랑”에 관심한 그의 적극적 추진력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정신(CHRISTLAN STEWARDSHIP)]
존 웨슬리는 돈이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라는 신념이 언제나 분명했다. 그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지만 그렇다고 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부가 쌓일수록 “거의 예외없이” 은혜 안에서는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심각한 염려를 하게 되었다. 만유의 주께서 “너는 내가 너의 손에 맡긴 세상의 재물들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광범위하게 사용할수 있는 돈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였는가? 너는 먼저 네 자신과 네 가족들의 적절한 필요를 공급하고, 그 다음으로 남은 수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돌려받겠다고 한 약속을 지겼는가?라고 물어보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돈을 어떻게 취함으로 우리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지 않게 할수 있을까? 그길은 하나뿐! 하늘아래 다른길은 없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돈을 벌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저축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주는“ 그런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더 많이 벌수록 더욱 은혜 안에서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근 하늘에 더 많은 저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웨슬리 부흥운동이 남긴 유산(THE LEGACY OF THE WESLEYAN REVIVAL)]
균형의 신학(A Theology of Balance)
첫 번째로 웨슬리 부흥운동의 중심에 있는 신학은 “균형의 신학”이었다. 스탁스 감독은 웨슬리 부흥운동을 가리켜 “생명력 있는 균형”(vital balance)을 가진 기독교라고 불렀다. 이 균형은 웨슬리 사상과 실천에서 거듭거듭 발견된다. 우리는 교인이 되기 위해서 많은 교리적 검증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본질적인 교리들은 가지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의견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모두가 똑같은 신학적,사회적,정치적 견해 등을 가질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공로 안에서 모두 함께 어울릴 수 있음을 기대한다.
두 번째로 웨슬리 부흥운동이 중심에 있는 신학은 “사람들을 위한 신학”이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열광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을 대중화시킨 사람이다. 비록 그는 훈련되었고, 지적이고, 교양있고, 학식 있는 사람이었지만, 사람들이 듣고 응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였다. 반면 당시의 다른 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일에서 실패하였다. 이런면에서 볼 때 웨슬리는 일하는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은 이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심과 필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웨슬리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었다.
1742년 석탄산업의 중심지인 뉴캐슬에서 본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는 욕설을 퍼붓는 가운데서 그는 이들은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이고 , 그들의 삶을 억누르고 무너뜨리는 경제적인 조건들로 인한 고통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일 뿐인 그들도 죄인임을 느꼈다.
웨슬리는 주일아침이 되자 뉴캐슬 가운데서도 가장 죄악이 만연한 장소의 한복판으로 가서 자신앞에 단 한 사람만이 서있는 가운데 설교를 시작하였다. 설교 본문은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이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이날 아침 그가 설교 하는 동안에 1,2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같은날 저녁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반면 그가 클리프톤에 있는 학교에 갔을 때, 그 자리는 부유한 사람들로 꽉 메워져 있었고, 그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7)라는 다른 본문을 택했다. 그리도 또 다른 경우 상류층이 모인 회중 앞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23:33) 라는 본문을 택해서 설교했다. 몇몇 사람들은 항의 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같이 대답했다.”만일 내가(여기보다 더 못 사는) 빌링스케이트에 서 있다고 한다면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요1:29)라는 본문을 택했을 것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세상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웨슬 리가 품은 비전은 곧 인간 본성에서 완전한 잠재력을 회복시키기 원하는 하나님이 주신 이 비전이 미래에 다가오게 될 위기들로부터 기독교가 능히 살아나갈 수 있는 올바른 자리를 발견하게 될 그날이 오길 계속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웨슬리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자신과 자신이 일으킨 부흥운동을 성장하게 하고 유지시켜 나가는 믿음과 메시지를 남기는 하나의 간증으로 보여준다. 웨슬리는 자주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을 말해왔다. 정말로 1971년 87세로 맞은 그의 죽음은 거룩한 경험이었다. 웨슬리는 그의 집 작은방의 침대에서 찬송을 부르며 다음날까지 숨을 쉬면서 그의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모아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모든 것 중의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입니다.”
이날 아침 웨슬리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그의 메시지가 결코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란다.
존 웨슬리의 죽기전 부른 아이작 왓츠(lsaac Watts)찬송을 소개하며 마칩니다.
“나의 숨이 있는 한 나 찬양하리 나의 창조주를
나의 죽음이 목소리를 앗아가는 그날까지
나의 고귀한 힘은 찬양을 위해 사용하리
나의 찬양의 날은 과거일 수 없네
나의 삶, 나의 생각은 마지막이 오지만 나의 찬양은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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